Monsieur Christian Dior
1905년 1월 21일 크리스찬 디올은 프랑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모든 부모가 그랬듯이 그의 부모들 역시 크리스찬 디올이 의사나 외교관이 되기를 바랬고 그들의 희망에 따라 평범한 학교 생활을 했다. 그러나 크리스찬 디올은 자신이 의사나 외교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학이나 정치관련 책들보다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정원에서 꽃을 가꾸기 좋아했고 그림과 의상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젊은 날의 그는 여러 친구들과 문학을 즐기고 연극을 즐겼으며 직접 화랑을 경영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그는 빠리 보헤미안의 생활을 만끽했다.
1931년 크리스챤 디올은 부친의 사업실패, 잇따른 화랑의 실패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당시 잡지사에서는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디자이너들의 옷을 보여주어야 했고 따라서 일러스트레이터 들이 필요하였다. 크리스찬 디올은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패션계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크리스찬 디올은 다른 디자이너의 스케치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디자인도 함께 작업을 하였다. 그의 천부적인 재질은 곡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그의 디자인을 사기 위한 디자이너들이 늘어났다. 그 중 삐게(Piguet)라는 디자이너가 크리스찬 디올을 전용 디자이너로 채용하게 되었다. 그때,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났고 그는 전쟁에 참여 함으로서 삐게의 자리를 놓치고 말았다. 전쟁 후 그는 시골에서 동생과 함께 농장을 가꾸며 살기를 원했지만 세상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그냥 놓아 둘리 없었다. 그는 곧 루시앙 르롱이라는 디자인 하우스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때 이미 그는 40세가 되어있었다.
40의문턱에 들어서 주위를 살펴보니 그의 친구들은 하나, 둘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르롤이라는 디자이너의 그늘 아래 있었다, 그는 드디어 1947년 마르셀 부싹이라는 재력가의 힘을 얻어 크리스찬 디올 꾸띄르 하우스를 열게 되었다.
크리스찬 디올의 첫 컬렉션은 성공적이었다. 전쟁의 상처에서 허덕이고 있는 파리, 여성 평등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패션 역시 짧은 치마와 남성화 되어가고 있는 재킷, 꼭 끼는 허리선 등 지극히 여성스럽고 엘레강스를 강조한 그의 컬렉션은 긴 가뭄 끝에 내린 시원한 소나기와도 같았다. 바로 ‘New Look’이 선보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찬 디올의 이름을 입에 오르내렸고 그의 명성은 곧 태평양을 건어 미국까지도 알려졌다.
John Galliano
존 갈리아노는 스페인 항구 도시인 지브롤터에서 영국인 배관공 아버지와 스페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여섯살 때 영국으로 이주해 돴다. 어린시절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화려한 옷차림에 플라멩고 춤을 즐겼던 그는 84년 세인트 마틴 예술 학교의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졸업작품 발표회 떄 바이어스 재단 기법을 사용한 탁월한 작품으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이듬해에 회사를 차렸다. 그러나 과감하고 정렬적이며 재기 넘치는 그의 컬렉션에 환호했던 사람들이 실제로 옷을 구입하지 않았고 이에 갈리아노는 잇단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의 재능을 안타까워 하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던 갈리아노는 93년 컬렉션을 계기로 성공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
95년 말엔 지방시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되었다. 그 다음해 지방시의 첫 오뜨 꾸띄르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크리스찬 디올을 거머쥐게 된것이다. 갈리아노의 컬렉션은 과감하며 민족적 정서를 담고 있다. 주로 전설이나 엣날 왕국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는 만큼 신비스런 이야기를 살려내는 힘이 있다. 그리고 크리스찬 디올과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는 변화를 보여주는 컬렉션을 통해 여성이 갖고 있는 힘을 아름답게 표출해 주고 있다. 존 갈리아노는 “오뜨 꾸띄르(맞춤복)건 프레타 포르테(기성복)건 형식적이고 무거워서는 안된다.현대적인 직물 기술과 마무리 작업 등을 통해 최대한 가벼운 옷으로 낭만적이고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이어갈 것”이라 밝히고 있다.
크리스찬 디올과 존 갈리아노. 이 두명의 천재 예술가가 보여주는 디자인 세계는 다르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적 집착’만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